Article - 1

검은화면, 비관주의를넘어서

삶의 연금술, 은박과 유황
닥종이 위에 은박을 붙이고 그 위에 유황을 이용하여 드로잉을 하는 김선태의 작업은 은박의 산화과정을 통한 색의 효과를 작품으로 표현한다. 유황을 통한 산화과정은 은박주위에 유황을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은박은 산화되기 시작하여 유황의 농도가 진할수록 순은은 누렇게 변해 끝내 까맣게 변해버린다. 이런 산화과정은 인간생멸의 축도처럼 아련하게 느껴진다. 광택과 순결, 고귀와 존엄의 은빛 상징은 어느덧 삶이라는 연금술로 변해가고 무거운 어둠 위에 변해버린 금속의 광택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과 적막을 형성한다. 이 심연과 적막은 인간존재개별이 갖는 단절과 슬픔, 빈 공간의 허무, 곧 작가가 사람들로부터 받은 다양한 감정의 편린을 반영한다. 지하철에서 피곤함을 못 이겨 곤하게 자는 아저씨, 역에서 누군가를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손에서 전화기를 놓지 못하는 아가씨, 고민이 있어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혼자서 고민하는 학생들, 어떤 사람과도 대화하고 싶지 않은 듯 큰 소리로 음악을 듣는 학생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슬픔에 가득 찬 눈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고독, 슬픔, 외로움, 소외의 감정을 품고 있다. 어쩌면 작가 내부의 감정이기도 한 고독한 내면표현은 감정을 공유하지 않고 차고 간결하게 흡수해버린다. 더 이상 상처받거나 간섭 받기 싫다는 듯 삶은 그렇게 검게 고정되어 있다. <혼자라고 느낄 때>(2008), <안락한 장소>(2009), (2010) 시리즈는 삶에 고정되고 소외된 인간존재개별의 깊은 슬픔을 검은 화면의 대비와 은박의 산화를 통하여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남루함과 존귀, 먹과 금박 고정된 검은 화면의 에너지는 현실의 무거움과 좌절, 불확실함을 반영하면서 현존(現存)만이 유일하게 실존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간에 의해 산화되어가는 삶의 비루함을 고착시키고 저지시킨다. 삶의 잃어버린 한 모습, 더 이상 산화되고 싶지 않은 욕망이 현실의 모든 색들을 단일화한다. 검은 색은 시간의 공포에 대한 절규이자 비루하고 무력한 삶에 대한 은유이다. 이 비유의 세계에 있는 인간의 모습은 지워지거나 변해가는 선의 형체로 나타나있다. 지워지는, 사라져가는, 형체와 색에 대한 복구의식이 금박의 선으로 나타나있다. 그러므로 금박은 은박과 유황으로 사라져 가는 인간존재의 허무에 대한 저항이자 존귀에 대한 의지이다. 김선태가 그려내는 인간상은 성인이나 신과 같은 경배와 존경의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혼자라고 느끼는’, ‘안락한 장소를 찾는’ 고독한 방외자이거나 삶에 지친 이들이고 누군가와 대화하거나 호명하지 않는다. 남루한 인생의 소외 속에 산화되어가는 인간에게 존귀의 옷을 입히는 것, 사라져가는 형체에 윤곽과 빛을 부여하고 소생의 열망을 심는 것, 이것이 금박의 이미지가 갖는 의미이다. 성인이나 종교적 선사가 내뿜는 거룩함은 없지만 인간존재로 나툰 삶 자체가 존귀라는 듯 모든 소멸에 저항하고 있다. 산화의 가장 깊은 상처에 금박의 형체와 선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숭고와 비관주의를 넘어서
금과 은, 검은 배경의 힘과 유황이 삶의 비루를 넘어선 숭고의 어떤 힘을 느끼게 한다. 개별 인간이 가지고 있을 상처와 기억, 그리고 강박관념이 시간에 무력하고 자연에 압도당하는 삶의 하잘 것 없음을 자각케하지만 확실히 검은 배경 속에 삶은 더 격해지고 확연히 각인된다. 삶의 순간에 느끼는 어떤 환각의 힘이 비관주의를 넘어서게 한다. 나<철가면>,<건담>시리즈는 동일본지진의 충격을 영웅적 노동자의 사투로 전환시킨 작가의 상상이 만들어 낸 결과물들이다. 쓰나미의 엄청난 충격 앞에 무력한 인간과 인위적인 인공물들의 처참한 잔해, 그리고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한 일상적 영웅들의 희생과 원전 속으로 달려들어간 최후의 투사들은 작가의 의식 속에 영웅적 모습의 건담을 떠올리게 하였다. 재해에 맞서는 이 수호자는 거대한 자연의 공포와 숭고에 대항한 고귀한 인간의지의 결정들이다. 산화한 고철 같은, 움직일 것 같지 않은 이 기억 속의 영웅들은 그러나 가족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빈약한 몸을 던진다. 동일본지진 이후 귀국해야했던 작가의 처지에서 이 일상의 영웅들은 수십 년간 애니메이션의 영웅으로 자리한 건담과 등치되었고 수많은 작은 영웅들과 처절한 일상의 서사가 되어 공포에 대항한 환각의 힘을 제공한다. 불타버린 폐선이 생의 의욕을 고취하듯 지진과 쓰나미, 인간개별이 갖는 깊은 소외와 슬픔을 넘어 현실과 현재에 대한 관심이 작가의 화면에 깊이 전제되어 있다. 김선태의 작품에서는 자연과 문명에 대한 공포와 절규, 시간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을 넘어서는 강렬한 생의 욕구가 역설적으로 화면에 나타나있다. 실제로 일본의 거리와 공원에서 남루와 노숙의 삶을 살고 있는 어떤 모습이 평화와 연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동반한다는 것을 작가는 목격한 바 있다. 삶에 대한 어떤 태도가 문명의 폐해와 압도적 자연의 공포 앞에서도 의연하게 할 수 있는지, 또한 하잘것 없는 삶에 대한 비관주의를 넘어서 일상을 숭고하게 하는지를 작가는 체험적인 진실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류철하(전시기획자)



Article - 2

참혹한 세상 속 희망과 치유의 수호자
금호미술관 2013.9.26~10.6

커다란 파도가 육지를 향해 몰려온다. 호쿠사이의 우키요에 작품집인 <후지산 36경> 중 가장 유명한 그림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의 파도다. 아니 이를 넘어선 쓰나미다. 그리고 이 거대한 쓰나미를 막으려는 ‘수호자’가 있다. 바로 건담이다. 로보트 애니메이션 주인공 중 우리나라에 ‘로보트 태권브이’가 있다면, 일본에는 ‘건담’을 빼놓을 수 없다. 화면에서 건담 일곱 기는 자신의 모든 힘을 동원해 거대한 쓰나미를 막아선다. 역부족이지만, 이 재앙을 막기 위해 그들은 수호자로서 자연의 거대한 힘에 대항해 최선봉에 선다. 금호미술관에서 열리는 김선태의 개인전 <수호자(The Guardians)>에 출품한 이 작품은 일본에서 겪었던 동일본 대지진의 트라우마와 이에 대한 치유의 기록이다.

2011년 3월 11일 지구엔 또하나의 커다란 상흔이 생기고 말았다. 일본의 동북부 아래쪽의 바다에서 발생한 지진은 거대한 쓰나미를 만들어냈고, 이는 고스란히 일본 동북부 해안을 따라 인류 최악의 자연재해 중 하나로 기록되는 결과를 낳았다. 쓰나미의 직접적인 피해뿐 아니라 최악의 2차 피해가 발생했다. 바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 유출이 그것이다. 이 거대한 사건은 지구의 모든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공포를 심어주었다. 충격적인 대사건을 겪은 직후 전세계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과거에 대한 증언과 반성이 이루어져왔다. 제1,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은 공산주의와 실존주의를 불러일으켰고, 미술도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반성하는데 역할을 보탰다.

작가는 대지진 때 일본 도쿄에서 활동 중이었다. 그러나 대지진 후 많은 유학생들이 그랬듯이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일본에서의 안정적인 작업 생활에서 급작스런 귀국이라는 환경 변화가 꽤 혼란스러웠다. 동일본의 참혹한 상황은 오롯이 그의 트라우마로 뇌리에 남았다. 한동안 작업에 대한 방황 이후에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수호자> 시리즈를 시작했다. 후쿠시마 원자력의 방사능 유출을 해결하고 쓰나미에 대항하는 ‘수호자’ 건담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일본이라는 한 국가의 재해를 넘어, 전지구적인 재앙에서의 회복과 인류애를 호소한다. 이번 전시에는 이와 함께 지난 동일본 대지진의 참혹한 참상을 두 점의 거대한 드로잉으로 증언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처럼, 이 시대의 아픔 또한 기록한 것이다.

김선태의 작업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우리 주변과 인간에 대한 관심’이다. 과거 작가는 길에서 만난 인물들의 표정과 행동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표현한 인물 시리즈를 제작했다. 이번 작업인 <수호자>에서는 인간보다 열 배나 강하지만 더 인간적인 건담을 통해 이러한 주제를 표출한다. 건담은 작가에게 이번 재해를 극복하고자 하는 수호자이자 사람들의 바람을 형상화한 대상이다. 건담은 그가 일본에서 작업할 때 이미 등장시킨 소재였다. 그는 건담이 항상 피곤하지만 아침에는 활기차게 출근해야만 하는 일본의 샐러리맨처럼 겉으로는 강하지만 그 내부의 조종사처럼 연약한,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그의 건담은 애니메이션 속 건담과는 달리 인간적인 눈동자를 갖고 있다. 일본의 재앙은 이러한 인간적인 건담의 의미와 함께 작가로 하여금 좀더 강한 수호자로서의 건담으로 의미를 확장케 했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의 작업 기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창시절 들었던 ‘한국화의 위기’라는 말은 그에게 오히려 한국화에 대한 기초로 돌아가게 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했던가. 과거의 재료로부터 새로운 한국화가 나올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고민과 함께 붓, 종이, 아교, 석채, 분채, 박 등 다양한 재료의 연구에 빠져들었다. 과거 김홍도나 신윤복이 그랬듯 그림마다 시대를 반영하고 정서가 새겨져 있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이러한 연구를 통해 더욱 확고해졌고, 일본에서의 확장된 연구까지 결합된 성과물을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다. 닥나무를 원료로 한 종이에 석채, 은박, 안료, 금니 등의 전통적인 채색재료를 결합시키고 작가가 원하는 마티에르를 얻을 때까지 긴 시간에 걸쳐 여러 레이어의 작업이 이루어진다. 단순한 먹이나 채색 작업이 아닌, 전통과 혁신이 혼재된 화려한 색감의 깊은 마티에르 작품은 한국화 혁신에 대한 작가의 연구와 성찰의 결과물이라 할 것이다.

최근에 작가는 <수호자> 시리즈와는 다른 작업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 일본에서의 트라우마를 넘어 한국적인 풍경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용인 작업실 주변의 동네 풍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특히 작가는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시골집을 통해 인간과 집, 더 나아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라는 문제에 대해 고민한다. <자화상>, <거리의 인물>, <수호자>, <동네> 등 다양한 주제와 소재, 기본을 잃지 않지만 다채로운 재료와 기법은 작가 김선태의 팔색조 같은 변화무쌍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속에서 그가 잃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레테르다. 그의 작품이 아무리 재앙의 아픔을 표현하더라도, 그의 건담이 희망 속 세상의 ‘수호자’가 되고 따뜻하게 다가오는 이유일게다.

류동현 미술비평



Article - 3

수호자 ― 건담에서 용으로 나아가다

작가 김선태는 2013년 금호미술관 전시 <수호자(The Guardians)>를 통해 거대한 쓰나미를 막아서는 영웅적인 주인공 ‘건담’을 등장시킨 바 있다. 인간을 덮치는 거대한 파도와 불가항력적인 자연, 망연자실한 인간을 대신해 가공할 공포에 맞서는 수호자인 ‘건담’은 마치 그러한 현실이 만화의 한 장면이길 바랄만큼 간절했다. 후쿠시마 원자로의 불을 끄러 가는 결사대처럼 ‘건담’은 재앙의 중심에서 그러한 재앙을 증언하고, 사라진 마을과 아이들, 무너지고 휩쓸리고 불타고 깨진 상처의 상징으로서 화면 속에 등장하였다. 만화의 주인공이지만 이 엄청난 트라우마를 견딜 대체자를 달리 찾을 수 없었던 작가는 건담을 통해 순수한 동심의 연결고리로서 사건에 대한 증언과 반성, 상징을 찾아냈던 것이다. 검고 붉으며 녹슬고 퇴색한 그리하여 어쩌면 금색과 은색으로 빛날 집과 마을, 사람들은 지구의 거대한 상처처럼 바다에 잠긴 풍경으로 화면에 등장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풍경 가운데 수호자인 ‘건담’의 초상이 존재한다. 건담은 압도적 재난에 맞선 자기보존의 본능과 항변, 연대에 대한 호소를 담아 크고 강력한 어떤 힘과 존재를 불러오고 싶은 욕구를 반영하는 상징이다. 

동일본지진에 대한 트라우마와 귀국, 작업에 대한 방황은 작가가 소도시에서의 작업실에서 발견한 동네 풍경으로 이어진다. 사람이 살지 않은 시골집들은 인간과 집, 사람들 사이의 관계상실을 말하는 것이다. 지진과 쓰나미에 대한 기억을 반추하듯이 김선태의 화면은 불타고 분해된 집, 살 수 없는 집, 침몰하는 선박, 잃어버린 작은 세계에 대한 기억, 등 스스로 부여한 강박을 작은 화면으로 제작하였다. 

이러한 강박이 치유될 즈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남쪽 바다에서 발생한 세월호 선박침몰은 재난에 대한 모든 상처를 일깨웠다. 침몰하는 선박과 수 백 명의 어린 목숨, 무책임, 몰염치가  관계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은 우리의 치부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인간성의 깊은 반성과 이해,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작가는 이 사건을 통하여 어린 목숨이 희생한 죽음과 슬픔의 바다가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하는 것이 무엇일지를 생각한다. 삶과 죽음, 재탄생의 신화를 반복하는 섬(島) 사람의 후손으로서 물과 용의 힘을 차용하여 죽음을 넘어서는 강력한 부활의 원형을 작품 속에 구현하고 싶어 한다.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제, 금강저와 같은 강력한 힘을 가진 용의 발톱, 불화와 민화의 모든 힘을 빌려 이 가공한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호자인 건담이 동아시아 보편적 상징과 위력으로서 용으로 표상된 것, 이것이 작가 김선태가 금번에 용을 그린 목적이다. 

낡고 퇴락한 장막을 찢고 승천하는 용은 현실의 비애도 애상도 잊은 듯 무궁하고 무진한 세계의 조화 속을 휘감는다. 사방시공(四方時空)을 바라보고 오탁(汚濁)을 두루 밟는 이 서수(瑞獸)는 무섭거나 징그럽기 보다는 해학적인 얼굴에 친밀감이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다. 어리숙하고 귀여운 듯 위엄을 잃지 않으면서도 인격적이다. 용이 출현하는 이 상상의 시공간은 현실초월이요, 해탈이면서 기원의 소리이다. 용은 본래 음악신(音樂神)이기 때문이다. 검은 비구름을 걷고 푸르고 붉은 신성한 빛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천지의 오색을 머금고 금빛으로 조화를 부리기도 한다. 

강렬한 폭풍이 우리를 뒤흔들고 난파(難破)시킬 지라도 물의 지혜와 부활을 관장하는 용이 있는 한 우리의 세속적 삶은 죽음과 부활을 거쳐 새로운 존재로 탄생할 것이다. 용을 그리는 의의는 인간의 욕심과 참화를 광명으로 돌리려는 지극한 공수가 동아시아 보편상징으로 현시된 것, 불타고, 침몰하고, 분해되지 않는 마을과 집의 수호자, 장엄한 시각적 풍경의 환영과 활력을 나타낸 것이다. 

작가는 석채와 금박, 은박, 안료 등 전통 채색화에서 사용되었던 재료를 다양하게 구성하여 현대적 화면을 통한 전통화의 의미 확장을 꾀하고자 한다. 민화적 단순성과 회화적 표현, 부식하고 깨트리는 재료의 물성이 충돌하여 장대한 화면을 구성하는 것, 그것이 김선태 화면의 특징이다. 마치 고대벽화의 뛰어난 효과, 물질적 상상과 원초적 생명조화가 발산하는 생기(生氣)가 가득한 화면 같은 것이 김선태가 추구하는 화면일 것이다.

류철하 (미술비평)



Article - 4

김선태 작가의 전시회 <무감각한 일상>에 부쳐

동양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서구철학의 청초한 개념과 명증한 논리가 주는 짜임새에 탄복하게 된다. 이에 반해 서양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동양 고전이 주는 건강한 지혜와 실천하는 삶의 자세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동양미술을 업으로 삼는 사람은 서양예술의 진취적 예술정신을 보고 조바심을 낸다. 반면 서양예술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동양예술이 견지하고자 하는 내면화된 정신성을 매우 존중한다. 이렇듯 근본적으로 상이해 보이는 현상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의 문장은 우리의 질문에 좋은 답변이 된다.

"서구철학과 정신적 수양을 기반으로 삼는 동양철학 사이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그 둘의 출발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구 사상가들은 '자아(Self)'로부터 시작한다. 이 자아는 '외부세계(outer world)'를 의심한다. 그리고 자아는 외부 세계를 연구한다. 동양철학은 세계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자아를 의심한다. 그리고 자아를 연구한다. 그것은 우리 서구인들이 관념론으로 경도되는 이유이다. 세계는 자아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반면 동양인들은 자아는 외부세계의 현상이라고 본다. 따라서 자아와 외부 세계 사이에 차이란 없다. 서구인들이 외부 세계를 연구하고 조작하면서 자연과학을 발전시켰다면, 동양인들은 내면에 대한 성찰을 계기로 내면에 대한 점진적인 지식을 쌓아왔다."

이 문장의 개요가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더라도 동서양의 사상에 대한 윤곽은 충분히 보여준다. 서구의 사상과 예술은 자아가 세계를 발전시킨 역사이다. 동양의 사상과 예술은 세계로부터 비롯된 현상의 본질을 찾아간 역사이다. 이렇듯 장황한 서두를 거칠 때 우리는 비로소 김선태 작가의 의도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동서양이 자아에 무게를 두는가 세계에 무게를 두는가에 따라서 사상의 지형이 바뀌었다. 김선태 작가는 이 두 가지 포지션을 옮겨가며 영역을 확대했다.

김선태는 초기에 섬이나 하늘, 산세를 그렸다. 자기 내면에 비춘 외부세계를 따뜻하고 습윤한 감수성으로 묘사했는데, 특히 섬 풍경을 제일 잘 그렸다. 그런가 하면 불가에 등장하는 사천왕이나 동양 신화의 여신들을 그리기도 했다. 그런데 외부 세계가 자기 내면에 반영된 모습을 천진하고 따뜻하게 그리는 방식에서 탈피하기 시작했다. 2004년 즈음부터의 일이다. 내면에 반영된 외부세계가 아니라, 외부 세계 자체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외부세계가 자연일 때 순수무구의 청정한 본연이건만, 외부 세계가 인사(人事)일 때 사특한 어긋남으로 다가오는 사실에 대하여 작가는 가슴 아파했다. 2005년부터 김선태 작가는 시야를 사회적 약자에게 집중시켰다.

시간에게 삶을 빼앗긴 노약자 · 제도에게 삶을 유린당한 노숙자 · 사회적 통념에 자리를 내준 노동자 · 쾌락의 수단에게 삶의 목적을 박탈당한 알코올 중독자 · 고귀한 가치의 상대적 위치에 있다고 해서 몰가치한 취급을 받는 모든 것이 작가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려야 한다. 일단 사진으로 담고 작업실에 와서 장지를 펴고 먹과 물감으로 담담하게 그려갔다. 그들이 '무감각한 일상'을 영위한다면 당연히 작가의 시야와 붓질도 정제되어야 하고 감정도 무덤덤해야 했다. 일말의 감정이나 판단을 자제했다. 먹물이 그려낸 검은 바탕은 땅거미가 져서 칠흑의 밤으로 가는 경계처럼 보인다.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빛을 의지해서 발산하는 갖가지 인간 군상은 초췌하면서도 초연해 보인다. 술에 취해서 누워있는 아저씨는 다시 일어나기는 하려는 것인가? 굽은 등을 겨우 펴가면서 앞으로 느린 걸음을 거듭하는 할머니는 언제쯤 집에 돌아가려나. 그리고 남들이 쓰고 버린 종이 상자들 묶음은 어째서 저리 속되고 진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토록 신성하게까지 느껴지는가? 나약한 비닐 우산에 의지해서 비 내리는 어둔 밤길의 터널을 걷는 여학생들의 미래는 밝은 빛에 놓여있는 것일까? 아니면 영구히 어둔 그림자로 남을 것인가? 당첨되지 않을 복권방은 이 땅에 어째서 이리도 많은 것일까? 그리고 신문지를 주워 만든 임시적인 돗자리에서 나눠 마신 소주의 취함은 두 노숙자를 위로하는 것인가, 아니면 마비시키는 것인가? 작가의 근본 물음은 매우 쉽지만 그 대답은 매우 어렵다.

동양의 고전 『회남자(淮南子)』에 보면 "하늘은 화(和)를 품었으되 내려오지 않고 땅은 기(氣)를 품었으되 올라오지 않는다. 그저 텅 비어서 적막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가운데 어둡고 어슴푸레해서 어떠한 조짐도 없다. 기는 오로지 깊고 아득한 곳에 통해있을 뿐이다." 이 문장처럼 김선태 작가의 배경화면을 잘 설명하는 문장도 드물 것이다. 하늘에 조화가 있고 땅에 기운이 있다면 응당 통해야 한다. 통하지 않은 상태는 어둠으로 둘러싸인 적막무짐(寂寞無朕)의 단계이다. 하늘의 조화와 땅의 기운이 소통하게 해야 한다. 그제서야 적막무짐이 아니라 본연의 우주가 된다. 인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간도 누구나 모두가 측량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다만 사회와 당사자 두 가지 주체가 모두 귀중한 가치를 스스로 막았기 때문에 작가가 그려낸 현상들이 나타난 것이다.

우리 동양의 고전 중에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귀중한 것이 있다면 『시경』과 『서경』이 한자리씩을 차지할 것이다. 『시경』에 나오는 단어 중 가장 중요한 말을 고르라면 당연히 '병이(秉彝)'일 것이며 『서경』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라면 응당 '강충(降衷)'을 꼽을 것이다. '병이'는 인간의 항상적인 도리를 뜻하며, '강충'은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좋은 천성을 가리킨다. 병이와 강충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다만 살다 보니 그것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었을 뿐이다. 마치 평생 단 한번도 음악을 듣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고 산 사람이 있듯이, 누군가 좋은 천성이 있는지도 모른 채 살다간 사람들이 허다하게 많을 것이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은 병이와 강충을 자각하고 본연의 천성을 회복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면 천지가 제 자리를 찾고 만물이 순행한다고 가르친다. 스스로 천성을 잊은 것도 문제이다. 그러나 그들을 방치하는 외부 세계의 제도도 문제이다. 김선태 작가가 문제로 삼은 것은 이 지점이 크다. 사회가 적극적으로 길 잃은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보수적 사회 시스템이다. 경제적, 문화적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적으로 쇠락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가난은 더 큰 가난으로 이어지고 부유함은 더 큰 부유함의 씨앗이 된다는 논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1974년에 노벨상을 받은 스웨덴의 경제학자 칼 군나르 뮈르날(Karl Gunnar Myrnal)이 평생 강구한 누적적 인과관계 이론이 그 사실을 밝혀냈다.

보수주의적 경제학의 대명사는 신자유주의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시장, 즉 경쟁을 최고의 가치라고 선전한다. 경쟁의 이유는 바로 더 많은 자본의 소유를 위함이다. 김선태 작가는 자본의 소유가 진정한 삶의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여민동락(與民同樂)하여 인정을 나누고 어려움을 서로 감싸줄 때 삶의 의미가 생성되며 병이와 강충이 명증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진정한 삶은 부유함과 병이와 강충의 실현이라는 상반되어 보이는 두 지점 사이,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병이와 강충을 자각하고 하늘이 부여한 천명을 따라 사는 삶은 매우 중요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숭고한 가치를 촉구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그렇다고 보수주의적 자본주의에서 내세우는 자본, 명예, 권력, 학벌과 같은 가치는 너무나 세속적이고 치졸하다. 이 둘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고 평생을 추구한 경제학자가 있다. 바로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라는 경제학자이다. 그는 진보주의 진영에서 사람들의 인권과 평등의 가치를 내세우는 사람이다. 이 위대한 경제학자는 사람이 올바르고 떳떳한 삶을 살기 위한 일곱 가지 조건을 연구했다. 건강 · 안전 · 존중 · 개성 · 자연과의 조화 · 우정 · 여가라는 것이다. 동양이 내세우는 내면적 가치와 서구가 추구해온 외부 세계 정복을 통한 인간 부의 실현 사이에서 참으로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가치라고 생각한다.

2005년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연의 아름다움을 너무나 잘 포착해냈던 작가는 갑자기 인간 삶의 고된 측면으로 자신을 몰아갔다. 사회가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의무감이 있었을 것이다. 12년이 지난 지금 작가는 인간의 보편적 행복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들을 살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술가의 바램은 현실 역사에서 언젠가는 실현된다는 말이 있다. 앤디 워홀의 상업적 상상력은 현실이 되었다.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도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동원이나 거연의 대산수도 중국의 어느 산골에서 아직은 살아있다. 발자크가 그린 불륜도 어딘가에서 늘 일어나며 마티스의 영감도 실현이 되어 전대미문의 춤사위가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김선태 작가가 생각하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되고 대부분의 인간과 인간이 서로 존중하고 우정을 나누는, 삶은 반드시 올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무감각한 일상'을 반성하여 활연(豁然)하게 소통하는, 일상이 즐거운 세계를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비평, 이진명



Article - 5

풍경의 재발견

"쓰나미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고, 오로지 나무 한그루가 버티고 있었다. 마을에 남은 나무 한그루, 이 또한 자연의 거대한 힘이 아닌가.[…] 대지진 이후부터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작가노트) 

김선태 작가의 이번 전시는 스스로 밝히듯 '풍경'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자신의 풍경에 매섭고도 잔혹한 자연의 힘을 표현하거나 그에 맞선 인간의 의지를 담으려 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붓질은 더욱 거칠었을 것이고, 색은 희뿌옇게 드러나야 했으며, 화폭 어딘가에 맥없이 주저앉는 근대적 인간이 등장해야 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그의 풍경은 일본의 유명한 문예비평가인 가라티니 고진이 근대 단편소설 <잊을 수 없는 사람들>에서 발견했던, 어떤 내적인 전도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그런 풍경과도 같다. 그려진 풍경은 후쿠시마의 광경이거나 작가의 작업실 지척의 큰 은행나무이기도 하고, 파도치는 고향의 바다이거나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들이 그려진 화폭의 색감은 때론 붉음이 작열하거나 에메랄드 빛 푸르기도 하고 생을 잠식하는 듯 짙은 검정이 가득하여 그 성격 자체가 다르다. 이렇듯 소재나 색채의 차이가 많음에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일관된 인상을 갖게 한다. 고요하고 정적이며 어찌 보면 냉담하기까지 한 인상. 아마도 그 이유는 화폭의 모든 장면이 김선태 작가의 일관된 내적인 감정에서 비롯한 하나의 풍경이기 때문이 아닐까.

문학에서 뿐만 아니라 예술, 특히 회화사에서 '풍경' 은 다양하게 표현되었고, 해석도 그만큼 다분하다. 그럼에도 프랑스 현상학자인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가 존재론적 회화론을 피력하기 위해 언급했던 세잔(P. Cezanne)의 "풍경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 라는 발언은 다분한 여러 표현 중, 특별하게 하나의 경구가 되어 현대예술을 비롯한 우리의 사유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세잔의 깨달음은 서구 지성주의의 주체와 객체를 구분 짓는 이분법을 전복함과 동시에 동양과 서양의 구분을 무화시킬 정도의 강도를 지니고 있다. 그는 젊은 시인 조아킴 가스케(J. Gasquet)와의 대화에서 "불교의 최고 경지인 열반, 무념무상의 세계, 오직 색만이 존재하는 세계! 그것이 바로 풍경"이라고 말한다. 세잔의 회화와 사유의 지극한 경지가 결국 동양사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선태의 고백과 그림을 보면서 그가 풍경을 다루는 태도가 세잔의 사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작가는 2011년, 쓰나미를 목도하기 전까지 현대 사회의 소외된 인물들의 군상을 비롯하여 나른한 오후의 한갓진 인물, 그리고 수호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상에 천착해 왔다. 그러나 큰 사회적 상흔을 남긴 쓰나미의 처참한 풍경을 보면서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고독하고 외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그 후, 작가는 쓸쓸함이 묻어나는 집과 나무를 찾아다녔고, 자신의 몸이 경도될 정도의 감흥을 지닌 대상을 만나면 바로 자신의 화폭에 하나의 풍경으로 기록했다. 그는 자연의 그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자연을 하나의 은유로 만들지도 않았다.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한 채 포착된 광경을 그 상황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 노력했고, 그렇게 그 광경은 그의 작은 화폭에서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세잔이 보편적인 자연을 색 자체를 통해 담아내려고 노력한 만큼, 김선태 작가 또한 자연을 하나의 풍경으로 재현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어 준 듯하다. 그의 그림에는 어떤 이야기 구조가 있지 않다. 오직 색과 형상으로 화폭을 채우고 자신이 전도된 집이나 나무를 하나의 풍경으로서 재현해 낸다. 자칫 평범한 풍경이 될 수 있는 소재나 장면을 역사화나 종교화의 그것처럼 은박 부식의 질감으로 화폭을 가득 채우거나 전통 안료의 특질을 장인의 태도로 다룸으로써 평면의 깊이를 지닌 심오한 풍경으로 만들어냈다.   

작가와 대화를 마치고 작업실을 나서는데 인근의 큰 은행나무와 미처 개발되지 않은 덕에 남은 빈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의 위력일까, 자그마한 몇 점의 그림 속 은행나무와 정자, 그리고 바람의 질감들이 시야에 중첩되었고 작가의 감흥이 일렁이는 하나의 풍경을 실감하게 했다.

박순영(朴筍泳)_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